행동편향

 오래 전 일이다. 우리 막내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인데, 그만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인근 산에 놀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만 한눈을 팔았나보다. 아이가 없어진 것이다. 아내와 나는 걱정에 휩싸여 동네골목길마다 곳곳을 다 뒤졌고 파출소에 신고까지 했다. 그렇게 탈진한 상태로 집에 돌아와보니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집에 와 있었다. 만약 그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와 조금 여유있게 기다렸더라면 그러한 난리를 피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디 사람이란 게 그렇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기가 쉬운가. 이러한 인간의 성향을 '행동편향'이라 한다.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면 부작위편향이고 기다려야 할 때 기다리지 못하면 행동편향이다.

 

 

나서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사람은 나서야 할 때와 기다려야 할 때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겠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대부분은 부작위편향보다 행동편향이 강하다. 하지만 그것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바뀐다. 행동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때는 행동편향이 앞서고 잠자코 있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되면 부작위 편향이 강하다. 특히 어떤 일을 하면 개인적 피해가 크고 하지 않으면 사회적 피해가 크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어떤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를 선호한다.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점령한 나찌는 레지스땅스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할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같이 잡혀온 한 사람이 "나는 억울하다. 나는 레지스땅스가 아니며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잡혀 와서 총살을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수년 째 온 국민이 고통속에서 신음하고 있고, 조국이 풍전등화에 처했는데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은 책임이 막중하지만 이는 소수일뿐이고 대부분 우리가 부담하게 되는 책임은 행동을 했을 때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하기를 꺼려한다. 행동하지 않았을때 돌아오는 손해보다 행동을 했을때 돌아오는 손해에 더 민감하여 행동을 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 독일의 사회학자 조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예로부터 불운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수단이었다. 행동하는 것은 책임을 떠 안게 되어 부당한 곤경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무관심이 현명한 처신으로 간주되었다."


​ ​이러한 사회는 아무런 진보가 없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죽을 병에 걸린 환자를 위해 어떤 약을 쓰도록 허용할 지 결정해야 하는 식약청의 고위 간부이다. 하지만 그 약은 강한 부작용을 갖고 있다. 그 약을 복용하면 10명 중 2명이 죽는다.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리겠는가? 만약 당신이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 같다면 그 약의 사용을 금지할 것이다. 그 약을 허용하여 8명을 살렸다는 칭찬보다는 2명을 죽게 만들었다 비난에 시달릴 것이다.
​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해 보자. 당신이 친구와 함께 히말라야를 등반하다가 친구가 크레바스에 빠졌다. 당신 혼자서는 그를 구조할 수 없고 구조대를 조직하여 다시 와야 한다. 결국 당신은 크레바스에 빠진 친구를 방치하여 그를 죽게 만든다. 이번에는 당신이 친구를 밀어서 크레바스에 빠지게 하여 죽게 만들었다고 하자. 누가 더 나쁜 행동인가.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라고 이야기 하겠지만 적극적 개입이나 소극적 방치나 똑같은 살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전자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덜 받게되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전자를 고를 것이다.
​ 이처럼 부작위 편향은 현대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현상에 해당한다. 신약의 부작용에 대한 처벌은 존재하지만, 신약을 개발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게 만든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사회는 없다. 그래서 영웅이 되기 힘든 것이다. 온갖 사회적 비난을 받을 것을 무릅쓰고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작위편향의 위험

 ​인간의 이러한 부작위편향이 때로는 비극을 만들어내는 방관자 효과를 유발하기도 한다. 1964년 3월 13일 새벽 3시 15분, 미국 뉴욕 어느 주택가에서 노상강도가 지나가던 키티 제노비스(Kitty Genovese) 라는 여자를 흉기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30여 분이 넘도록 여자는 격렬히 저항을 하며 도움을 청하는 소리를 외쳤고, 주변의 집에 불이 켜졌지만 그 뿐이었다. 나와 보는 사람도, 경찰에 신고한 사람도 없었다.
​ 결국 경찰이 신고를 받은 것은 여자가 죽은 지 20분이 지나서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 미국은 사건의 목격자 38명이 어째서 키티 제노비스가 죽도록 내버려 뒀는지에 대해 인간성 말살, 도덕적 의식 결여 등의 의견이 분분했다. 이 사건을 지켜보던 심리학자였던 뉴욕대학의 달리(J.Dorley)와 컬럼비아 대학의 라타인(B.Latane)는 사건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봤다. 즉, 당시의 목격자들이 도덕관념이 약해서도 아니고, 인간 소외의식이 팽배하기 때문도 아니며, 단지 목격자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실험을 계획하였다. 1968년, 실제 실험 목적을 숨긴 채 대학생들을 모아 집단 토론 실험이라 설명한 채 한 명씩 다른 방에 들어가도록 했다. 토론 진행은 마이크로폰과 헤드폰을 이용해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했고, 토론 인원은 2명, 4명, 7명 등 여러 가지 변수를 뒀다. 그리고 토론자로 위장한 조교가 “도와달라”는 말과 함께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연극을 했다.
​1:1 토론하던 학생은 85%가 밖으로 즉시 달려가 실험 조교에게 사고가 났음을 알렸다. 하지만 4명이 토론하던 경우는 62%, 7명이 있던 경우는 31%만이 외부에 사고 보고를 했다. 상황 종료 후, 사고 보고를 하지 않았던 학생들에게 왜 보고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자, “알려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몰랐지만 남들이 알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대답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달리와 라타인은 1969년 한 가지 실험을 더 추가하였다. 피실험자들을 모집한 뒤, 여러 개의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각 대기실에는 인원수를 달리해 혼자, 혹은 여러 명이 함께 들어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있는 대기실마다 문틈으로 연기를 주입하였다. 학생들은 연기가 단순한 수증기인지, 불로 인한 것인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혼자서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75%가 2분 이내에 연기가 난다는 사실을 연구 조교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여러 명이 함께 있던 대기실에서는 6분 이내에 13%가 보고했을 뿐이고, 사람이 많아질수록 보고 비율은 더 낮아졌다.
실험이 끝난 후, 피실험자들에게 보고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불안하긴 했는데, 남들이 가만히 있기에 저도 별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대답했다.
2003년 2월 18일.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지하철 사건도 이러한 부작위 편향으로 인한 대중적 무관심이 대규모 인명피해를 낳았다.

 

 

행동하는 자의 사회가 되지 못하면

 국민의식의 수준이 높은 성숙한 사회란 개인의 피해가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사회 공동체를 위하는 일이라면 주저함 없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회이다. 어떤 일을 하면 개인에게 피해가 발생하지만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면 피해는 개인보다는 사회적으로 피해가 발생한다. 전자는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하지만 후자는 사회가 지므로 개인에게는 피해가 덜 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피터는 자기 근처로 도망가던 도둑을 '내 일이 아니니까'라면서 그냥 보내 버린다. 그러나 직후 벤 파커 삼촌이 살해당하고, 범인을 잡은 후 그 범인이 자신이 그냥 보내준 도둑이란 사실을 알게 된 피터는 큰 충격을 받는다.
이러한 일은 영화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많은 조직과 개인들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하지만 행동하지 않는 자들이 많은 사회는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더 치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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