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에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위험진단을 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원자력 발전소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소 안전사고는 0%입니다. 30년 전 처음 가동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방사선 누출 사고를 포함한 안전사고가 단 한 건도 없었습니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안전의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틀릴 수도 있다. 국제 원자력 기구(IAEA)가 정한 원자력 사고 고장등급(INES ,International Nuclear Event Scale)에 의하면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등급은 7단계로 구성되는데 1~3등급을 고장이(incident)라 하고, 4~7등급을 사고(accident)라고 한다. 또한 안전에 중요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등급이하(0등급; Below Scale)라 하여 경미한 이탈(Deviation)로 분류하고 있으며, 안전과 무관한 사건은 등급외 사건(Out of Scale)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식적인 통계와는 달리 각종 환경단체에서는 국내 원전이 가동된 이후 수십년 동안 수백건의 크고 작은 고장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팀의 자료에 의하면, 영광에서 2003년 5·6호기 열전달 완충판 이탈했고, 동년 12월에는 5호기 방사성 오염폐수 3500t이 5일동안 바다 유출되었으며 월성·울진에서도수 많은 원전 사고가 있었다.
기술문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류는 인간이 만들어낸 위험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 하며 위험과 공존하며 살아가야만 하는데 문제는 공존가능한 위험인지에 대한 판단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기술문명에 자신감을 보여왔지만 크고 위험하고 치명적인 사고들은 모두 20세기 초입에 발생한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계최초의 원전사고하면 1986년 4월 26 에 발생한 체르노빌 사고를 떠올리지만 세계 최초의 시설외부로의 위험을 수반한 사고는 1978년 3월 28일 미국 펜실바니아주 미들타운 스리마일 섬(Three m ile island)에서 발생했다. TMI사고가 중요한 점은 위험의 원인을 제거하여 안전을 유지할수 있다는 기존의 기계론적 관점을 틀을 완전히 깨버린 사고였다는 점이다. 이 사고의 문제의 핵심은 인적요인이었다.
당시 이 사고를 조사하던 사회학자 찰스페로는 사고원인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 앞으로도 동일한 사고가 발생할수밖에 없다는 놀라운 통찰을 발표했고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1984년에 정상사고(normal accident)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원전·석유화학 공장·항공기·댐·지진·광산·호수·우주탐사·핵무기·DNA 재조합 분야에서 이미 발생한 대형사고와 발생 개연성이 충분한 사고를 연구·분석해 사고발생의 '진정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 규명하고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설계·설비·절차·운용자·환경 같은 각각의 요인이 뒤얽혀 상호작용하는 긴밀하게 연결되고 복잡화된 시스템에서는 사고는 필연적이며, 기술이 발전되고 인류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TMI와 같은 원전사고는 또다시 재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을 증명하듯 그로부터 27년 후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에서 국제 원자력 사고 등급(INES)의 최고 단계인 7단계(Major Accident)사고가 발생하였다.
현대사회 위험관리의
패러다임의 변화
하인리히의 도미노 이론은 지금까지 모든 위험관리를 대표하는 이론으로 여겨져 왔지만 오늘날의 그의 이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알수 있는 원인이 있다는 매우 선형적인 인과론에 근거한 것인데 오늘날의 복잡한 시스템에서는 잘 들어 맞지 않는다.
기존의 위험관리란 시스템을 정상적인 요소와 프로세스를 비정상적인 요소와 프로세스로 나누고 시스템에서 비정상적인 요소와 프로세스를 발견하여 제거함으로써 사고를 방지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고는 이와같은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시스템의 프로세스를 정상적인것과 비정상적인것으로 양분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방식은 생산이 단순하고 기계설비의 신뢰도가 낮은 경우에만 유효한 접근방식이었다.
오늘날의 화학플랜트를 비롯하여 반도체, 발전소 등 첨단산업현장에는 안전점검만으로 드러나지 않는 여러가지 위험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위험요소들은 안전설계나, 매뉴얼로 해결하기 어렵고, 누락되기도 쉬우며, 개인과 조직간의 상호간섭 등으로 인한 변동성이 산재해 있다. 그 변동성이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들이 심각한 사고를 초래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위험관리는 그 변동성을 허용가능한 위험수준 이내로 낮추는 것이 관건이다.
어느 하루
찰스페로는 그의 책 정상사고(normal accident)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당신은 오늘 중요한 면접을 앞두고 있다.
당신의 배우자는 커피주전자를 불위에 그대로 올려 놓고 나가는 바람에 유리 주전자에 금이 갔고,
다른 커피메이커를 찾느라 시간을 소비한다.
주차장에 가서야 차열쇠와 집열쇠를 집에 두고 온 것을 깨닫고 집에 가서야 깨닫는다.
평소 보조키를 문옆에 숨겨두지만 친구에게 빌려주고 없다.
이웃집에 할머니에게 차를 빌리려 시도하나 그 집차는 고장나서 수리를 맡겨놓은 상태이다.
남은 수단은 대중교통인데 파업때문에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택시를 불러보지만 아무런 연락이 없다.
결국 당신은 면접관 비서에게 어렵게 사정을 설명하고 날짜를 뒤로 미룬다.
당신의 합격율은 급격히 낮아진다.
위의 경우와 같이 불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머피의 법칙과 같은 일은 우리 일상생활속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확률은 매우 낮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화학플랜트, 우주항공 우주탐사와 같은 고도화된 시스템속에는 그 발생확률은 매우 높아진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차가 엔진이 꺼지거나, 어떤 고장이 났다면 길가에 세우고 직접 고치거나, 긴급출동서비스를 부르면 된다. 하지만 비행기가 하늘에서 엔진이 꺼지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주탐사선이 우주에서 엔진 고장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찰스페로의 통찰은 매우 놀라울 만한 발견이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어느하루와 같은 불운에 불운이 꼬리는 무는 현상이 수시로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와 같이 과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안전이 사회문화로 자리잡지 못한 국가에서의 사고는 굳이 이러한 첨단시스템까지도 갈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이 안전수준의 민낯을 보여준 2014년 세월호사고를 예를 들어보자. 조사결과 세월호 사고의 원인은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 였다.
1. 화물의 과적
2. 화물의 고박불량
3. Stabilizer의 미작동
4. 과적된 화물로 인한 평형수 부족
5. 사고지점의 해류
6. 위험한 해류지점에서의 선장의 이탈
7. 조타기 조작시 일시적정전과 방향타의 과조작
이와 같은 7가지 원인 중에서 하나만 없었더라도, 이들을 방호하는 방호계층이 하나만 제대로 작동했더라도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고는 어쩌다 생긴 특수한 조합에 의해 모든 방호계층을 통과하여 발생하고 말았다.
하물며 이보다 더 복잡하고 긴밀하게 가동되는 시스템속에서 사고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이것을 간파한 것이 찰스페로의 정상사고이론 (Normal Accident Theory) 이다. 찰스페로는 우주탐사,유전자 재조합기술, 화학공장, 핵무기, 핵발전 기술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사고 발생시 감당할수 없는 기기술은 시스템의 폐기를 주장하였다.
한국원전은
과연
안전할까?
원자력 발전소의 시설들을 둘러보면서 원전관계자들과 이야기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원전의 안전성에 대해 매우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원전은 만년을 초과하는 가능최대강수에 의한 홍수 수준에서 설계하기 때문에 후쿠시마처럼 지진해일에 의해 원전이 침수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우리나의 지진위험도 분석은 "확률론적 안전성 평가방법" 에 의하고 있다. 이 방법은 쉽게 말하면 해당 부지가 과거 얼마만큼의 재현주기를 가지고 지진이 발생하였는가에 대한 "지진재해도 평가"와 해당 구조물이 지진발생시 파괴될 수 있는 확률을 예측하는 "지진취약도 평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확률론적 지진재해도 분석(Probabilistic Seismic Hazard analysis: PSHA) 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문제는 한반도의 지진발생빈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그 강도도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로 인해 최근의 자연현상은 우리가 예측할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 작년에 발생한 54일간의 최장장마는 기상청은 물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자연현상이었다. 인간이 속한 자연은 예측 할수 없는 곳이다. 예측불가능한 자연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할수 있다는 것은 자만심에 불과하다. 게다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아무리 교육과 훈련을 통해 불안전한 행동을 방지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건망증이나 깜빡 잊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한데, 특히 원자력 발전소와 같이 고도화된 시스템에서는 사소한 실수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우리나라의 원전수는 25기로 세계 6위이며, 밀집도로는 세계 1위이다. 게다가 원전밀집지역 주변으로 부산 355만, 경남 336만, 경북 270만, 대구 248만, 울산 117만 총 1326만명이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동해안에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같은 사고가 발생한다면 국가의 존망이 알수없는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사고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만 발생하는 이례적인 현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속한 고도화된 시스템에서는 더 이상 하인리히의 법칙이 유효하지 않다. 그가 말한 불안전한 행동과 불안전한 상태를 제거하여 사고를 방지할수 있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더이상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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