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다양화되고 더욱 복잡해지고 있는 과정속에서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는 방법이 쉽지 않게되면 어러가지 크고 작은 사고들이 발생할수 밖에 없다. 산업현장에 설치된 크레인 조종버튼의 경우 조작실수로 여러가지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하루는 피카소가 기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던 중 옆 좌석의 승객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승객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나자 현대예술이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면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카소는 그에게 실재라는 것의 믿을 만한 본보기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고 했다. 승객은 지갑 크기의 사진을 한 장 꺼내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요! 진짜 사진이죠. 내 아내와 정말 똑같은 사진이요” 피카소는 그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주의 깊게 들여다 보았다. 위에서도 보고, 아래로도 보고, 옆에서도 보고 나서 피카소는 말했다.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 작군요. 게다가 납작 하고요.
우리가 사과를 볼 때 뇌에 사과처럼 생긴 그림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뇌는 그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과의 대응하여 가설을 만들어낸다. 망막에 비쳐진 이미지는 해체되어 선과 윤곽을 기술하는 전기신호가 되고, 이 신호들은 뇌 속을 돌아다니면서 재부호화를 거친다. 이때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인 게슈탈트 법칙대로 조직화되어 뇌의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사전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한다. 이처럼 본다는 것의 과정은 꽤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만 우리의 뇌는 이 복잡한 연산을 순식간에 해낸다.
사람이 사물을 알아채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이 '지각심리학'인데, 지각심리학은 크게 직접지각과 비직접지각심리학으로 나누어진다.
미국의 심리학자 깁슨(James Jerome Gibson, 1904~1979)은 직접지각을 주장했는데 직접지각은 사람이 감각기관을 통해 사물을 받아드릴 때 사물이 존재하는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 깁슨은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Affordance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Affordance란 특정한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외면적 속성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무엇인가를 말한다.
여기에 공이 있다. 이 공을 던질수도 있고, 발로 찰수도 있다. 이처럼 사물과 사람사이에는 그 독특한 관계에 따라서 우리에게 어떠한 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속성이 있는데 이를 어포던스 (Affordance) 라고 한다.
깁슨과 달리 도널드 노먼(Donald A. Norman, 1935 ~ )은 비직접지각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전통적인 심리학의 관점으로, 사람이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아드릴때 뇌에서 그에 대한 이미지를 생성하고 왜곡된 기억을 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의 의하면 사람에게 어떠한 특정행동을 유발하게 하는 요인은 그 사물의 생김새와 같은 속성이 아니라 사물을 인지하는 그 사람의 과거의 지식과 경험이다. 어떠한 사물을 볼때 나의 장기기억속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를 감각정보와 비교하여 사물을 인지한다.
깁슨과 노먼은 나이가 서른 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종종 맥주를 마시며 격한 토론을 나눴다고 한다. 깁슨과 노먼의 가장 큰 차이는 인간이 정보를 처리할때 감각을 중시하느냐, 지식을 중시하느냐는 것이다.
아래의 그림에서 각 단어의 두번째 글자는 모두 같으나 앞에서는 H로 해석하고, 뒤에서는 A로 해석한다. 이를 맥락효과라고 한다.
맥락효과(Context effect)란 최초로 알게된 정보가 그 이후에 알게된 새로운 정보들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하고 전체적인 맥락을 만드는 현상을 말한다. 즉, 먼저 제시되는 정보에 의해 뒤에 제시되는 정보의 해석이 달라지게 되는 현상이다. 노먼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는 사물을 지각할 때 경험을 이용하기 때문에 배움과 학습이 매우 중요하다. 노먼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만 인지할 수 있다.
아래의 그림에서 A가B보다 어둡게 보이지만 사실은 같다. B는 그림자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뇌는 원래보다 더 어둡게 해석한다. 더 어둡게 보이는 상태에서 A와 B의 밝기가 같다는 것은 B가 A보다 더 밝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의 뇌가 가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각은 뇌가 만들어낸 착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지각을 그대로 믿을수는 없다.
옛 말에 몸이 만냥이라면 눈은 팔천냥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감각정보의 80%를 눈이 담당할 만큼 외부에서 정보를 받아드릴때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하지만 귀는 눈보다 정확하고 손은 눈보다 빠르다. 영화 타짜에서 보면 밑장빼기 기술로 평경장을 속이려고 하는 고니에게 평경장은 "밑장을 빼면 소리가 달라 소리가"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눈은 그리 신뢰할 만한 감각기관이 아니다. 개는 시각보다는 청각과 후각이 더 발달되어 있고 박쥐는 아예 눈이 없고 귀가 눈을 대신한다. 하지만 이러한 동물들은 인간보다 더 사물을 온전하게 식별한다. 눈이 없는 동물들은 있지만 청각이 없는 동물들은 없다. 청각은 시각보다 뛰어나다. 인간의 뇌에서 시각적 정보는 경우 초당 15~25번의 변화만 인식할 수 있지만, 청각적 정보는 초당 200회 이상의 변화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남성은 시각에 빠르게 반응하지만 여성은 시각보다는 청걱에 대한 반응에 더 민감하다.
우리가 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현상뿐이다. 게다가 그 현상도 왜곡과 착시현상때문에 온전히 인식하기도 힘이 든다.
위대한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사물의 실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을 정도이다. 칸트는 세상을 현상과 물자체(物自體)로 분리했다. 현상은 앞에 드러난 세계이고 물자체는 현상 너머의 진짜 세계인 실재(實在)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진짜 세계는 결코 알 수 없다.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니라 내가 나의 경험과 생각과 사고가 재구성해낸 주관적인 세계이다.
인간은 뇌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수집되는 복잡하고 애매한 정보를 단순화, 조직화하려는 특성이 있다. 우리가 어떤 자극에 노출되면 그것들을 하나하나의 부분으로 보지 않고 완결, 근접, 유사의 원리에 입각하여 자극을 하나의 의미 있는 전체로 만들어 지각하려고 한다. 이것의 사고의 조직화라고 하는 게슈탈트(Gestalt)과정이다.
아래의 그림에서 컵과 사람의 얼굴,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조직화해야 사물을 이해할수 있다.
2차대전 초 미국에서는 복잡한 버튼들과 계기들로 이루어진 비행기 만들어 출격시켰을 때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적과는 싸워보지도 못하는 추락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하곤 하였다. 인간의 인지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설계 탓이었다.
오늘날의 항공기 조종석에도 여전히 많은 버튼들과 계기들이 부착되어 있지만 이 장치들은 옛날보다 훨신 직관적으로 설계되어 고유 기능에 부합되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조종사들은 기기들의 형태를 보면 직관적으로 그 쓰임새를 알아차릴수가 있어 인지적 부담율이 덜하다. 자동차에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센터페시아에는 수많은 버튼들이 모여 있는데 이 많은 버튼들을 운전자가 인지적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버튼들이 자신의 기능을 잘 표현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아래의 사진은 자동차 문 옆에 달린 좌석의 작동버튼이다. 좌석과 등받이 모양의 버튼을 밀거나 당기기만 하면 시트가 움직인다.
피카소는 사람이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을 기존과는 달리 새롭게 제시한 인물이었다. 피카소의 작품 "어느 투우사의 죽음"에서 황소의 목에서 죽어가는 투우사의 모습을 피를 한 방울도 없이 붉은 천인 뮐레타만으로 그의 죽음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왜곡되고 비현실적인 그림같지만 그는 그가 의도하고자 하는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방식을 표현한 그림은 피카소의 입체파가 탄생하기 훨씬 전에도 이미 존재하였다. 아래의 그림들은 런던 대영 박물관에 보관도이어 있는 고대 이집트의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들이 있다. 얼굴, 발, 팔은 옆으로 향하고 있지만 가슴은 정면을 향하고 있고 눈도 정면을 향하고 있다.
네바의 정원도 마찬가지이다. 그림 가운데 있는 연못은 분명 위에서 내려다 본 그림이지만 그 안에서 놀고 있는 오리는 옆에서 본것처럼 그려져 있다. 주위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그림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이집트인들이 그림을 그리는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사물의 본질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애를 썼을뿐이다.
피카소의 큐비즘은 이집트 미술을 재해석한 결과이다. 피카소가 열차안의 승객에게 사진이 실재를 표현하기에 너무 터무니없다고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은 우리의 경험과 의식에 의한 현상학적인 세계관의 투영일 뿐이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근대의 모든 철학은 그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칸트가 말한 현상과 물자체(物自體)도 이미 BC 427년에 활동했던 플라톤 이데아론의 재해석이었다.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통해 우리의 세계의 본질은 본질이 아닌 현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동굴속에 묶여있는 인간들은 세계를 직접보지 못하고 동굴벽에 투영된 본질세계의 그림자만 볼 뿐이다. 어느날 한 사람이 쇠사슬을 풀고 동굴을 탈출해 동굴밖의 세상을 보고 온 뒤에 사람들에게 자신이 보고 온 것을 말하지만 아무도 그의 믿지 않는다. 이미 일종의 프레임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기기와 기계들은 더욱 복잡해지고 더욱 분화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능력은 한계가 있다. 조종장치와 표시장치를 만들때 우리는 이것을 고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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