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김훈 자문위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이 그동안 우리는 너무 결과만을 중시하는 조급한 가치관을 갖고 살아온 것 같다. 서구는 300년에 걸쳐 산업화를 이루었지만 우리는 30년만에 이루었다. 안전도 마찬가지이다. 300년동안 안전문화를 성숙시켜온 서구와 30년동안 이룬 우리가 안전문화 수준이 같을 수는 없다.
한국의 재해율은 산업화 이후 2011년까지 꾸준히 감소해 왔고, 2012년부터 지금까지 약 0.5%대로 연간 재해자수가 10만명을 넘지 않는다. 이 수치는 매우 양호한 수치로 겉으로만 보았을때 한국의 산재율은 여느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독일의 재해율과 한국의 재해율을 비교해 보면 어느 나라가 높은가 묻는다면 당연히 한국이라고 하겠지만, 독일의 재해율은 우리보다 3배나 높은 2.5% 정도로 연간 재해자수가 100만명이나 된다. 하지만 사망만인율을 들여다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이 독일보다 3배나 높다.
고용노동부의 통계에 의하면 2020년 사망자수는 2062명으로 매일 6명 이상씩 죽는다. 이렇게 사망자수는 높은데 산재율이 낮은 이유는 산재 인정문제, 사각지대 문제 등이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산재은폐이다.
그동안의 우리나라의 산재 대책이 과정보다는 결과 위주로만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왜곡된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무재해'란 무재해운동 시행 사업장에서 근로자가 업무에 기인하여 사망 또는 4일 이상의 요양을 요하는 부상 또는 질병에 이환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의 산재예방 활동 중에는 무재해운동이라는 것이 있다.
무재해 운동이란 인간존중의 이념을 바탕으로 사업주와 근로자가 함께 참여하는 것으로, 사업장의 업종과 규모에 따라 정해진 기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벌이는 산재예방활동을 말한다. 무재해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의 임기 말기인 1979년 9월1일에 시작되었다. 1989년 10월 1일 한국산업안전공단이 생기면서 무재해운동에 관한 업무는 노동부에서 산업안전공단으로 이관된다.
1992년 8월 21일 부터는 무재해운동을 전국민 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총리, 각 부터 장관부터 종교계의 저명인사에 이르기 까지 천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1년동안 총 10,097,609명이 서명하며 광범위하게 운동을 전개했다.
무재해운동의 적용사업장은 상시근로자 50명 이상인 안전관리자를 선임해야 하는 사업장으로 건설공사의 경우 도급금액이 10억원이상이다. 무재해운동은 사업체의 업종과 규모에 따라 평균적으로 재해 1건이 발생하는 기간 동안 무재해를 달성하면 정부가 인증을 해주는데 평균 재해 1건 발생기간 동안 무재해를 달성하면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상, 2~3배를 달성하면 고용노동부 장관상, 5배를 달성하면 무재해탑을 세우는 식으로 포상을 하였다. 그래서 사업장마다 무재해 달성을 경영지표 중 하나로 삼았고, 정부로부터 인증받은 사실을 자랑하기도 했다. 제일모직은 2005년 섬유업계 최초로 무재해 목표를 10배초과 달성했다. 무재해운동을 실시하기 전에는 하루 1번꼴로 산업재해가 발생하였지만 87년 이후로는 1건의 사고도 없었으며 그결과 산재보험료를 40%나 감면받게 된다.
무재해운동에는 3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는 무의 원칙이다. 무재해란 단순히 사망재해나 휴업재해만 없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사고가 아닌, 사업장 내의 모든 잠재위험요인을 적극적으로 사전에 발견하고 파악‧해결함으로써 산업재해의 근원적인 요소들을 없앤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안전제일의 원칙이다. 무재해운동에 있어서 안전제일이란 안전한 사업장을 조성하기 위한 궁극의 목표로서 사업장 내에서 행동하기 전에 잠재위험요인을 발견하고 파악‧해결하여 재해를 예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째는 참여의 원칙이다. 무재해운동에서 참여란 작업에 따르는 잠재위험요인을 발견하고 파악‧해결하기 위하여 전원이 일치 협력하여 각자의 위치에서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재해운동은 산재가 발생하지 않는 사업장을 포상하고 공공발주 공사에 입찰할 경우 가산점을 줘 무재해를 독려했다. 무재해운동은 2018년 1월 30일까지 존속하며 폐기까지 39년동안 288,937개소의 사업장이 무재해 운동을 펼쳐 총 79,167곳이 인증을 받았고, 기업의 안전풍토조성으로 노사화합, 생산성향상 등으로 기업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당시에는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 수준이 매우 낮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산업화에 대한 재해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고 재해 예방을 위한 경각심을 일깨웠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하지만 초기의 좋은 취지와는 달리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2017년 9월 한 근로감독관이 마사회에 특별근로감독을 나갔다. 그 곳은 최근에 발생한 산재가 없다고 보고된 사업장이었다. 근로감독관은 팔에 깁스를 한 마필관리사 한명을 발견했고 그 이유를 추궁한 결과 말 뒷발에 차여 팔이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기업은 물론이고 재해를 당한 사람도 부서별로 인센티브를 주니 산재가 발생하였을때 자처하여 사고를 은폐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른 업종에 비해 산재가 잦은 건설업종에서 오히려 산재 은폐가 더 심각했다.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건설공사의 경우 PQ(입찰참가자격심사) 단계에서 산재 여부를 반영한다. 그러다 보니 입찰에 불리할까 봐 산재사실을 숨기는 일이 잦아졌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초기에 막을 수 있었던 사소한 사고가 목숨을 앗아가는 대형 사고로 커지는 경우가 나타났고 당연히 사망만인율도 증가했다.
무재해운동의 본래 취지는 퇴색되어 갔지만 이 운동은 산업현장에서 광범위하게 꽤 오랫동안 전개되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무재해를 지표로 한 결과지향적인 산재관리가 산재예방에 대한 관리보다 복잡하지도 않고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다. 산재를 관리하는 공공기관의 입장에서는 무재해라는 목표만 설정해주면 되고, 달성과 실패 여부로 사업장을 관리하는게 훨씬 편했다.
무재해운동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집중해야 하는 운동이었다. 목표지향적이 아닌 과정지향적인 운동이 되었어야만 했다.
세상은 모든 것을 결과로 판단하지만, 모든게 그렇듯이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과정이 올바르면 시간이 오래걸릴 수는 있지만 결과는 항상 옳기 마련이다.
내가 이룬 성취보다 내가 걸어온 길이 더 중요한 것처럼 기업 또한 기업이 거둔 실적보다는 그 기업이 걸어온 길이 더 중요하다. 안전도 마찬가지이다. 한 기업의 안전풍토는 하루 아침에 생겨나지 않는다. 오랜 과정을 거쳐야 성숙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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