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반복되는 산업재해를 단순히 근로자의 실수로만 돌리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사고는 규정 미준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조직문화와 분위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안전은 어떻게 조직의 ‘습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교육과 규정만으로 부족하다면, 심리학적 접근을 통해 안전을 무의식에 각인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번 글에서는 ‘동조 효과’와 ‘프라이밍 효과’라는 심리 원리를 바탕으로 안전문화를 내면화하는 방법을 살펴본다.
동조 실험과 안전행동: "다수가 하면, 나도 한다"
솔로몬 애쉬(Solomon Asch)의 ‘동조 실험’은 다수의 의견이 개인의 판단을 얼마나 쉽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실험 참가자들은 명백히 틀린 답을 다수가 선택할 경우, 자신도 틀린 답을 따르는 경향을 보였다. 이 원리는 조직 내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대부분의 직원이 안전 행동을 실천하면, 나머지도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이를 유도하려면 ‘안전 행동이 기본값(Default)’인 조직 분위기부터 조성되어야 한다. 단순히 규정을 강조하는 걸 넘어, 안전을 ‘조직의 기본값’으로 각인시키는 설계가 필요하다.
프라이밍 효과: 안전 메시지를 반복하면, 행동이 바뀐다
프라이밍 효과(Priming Effect)란 특정 자극이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적 현상이다. 예를 들어, 슈퍼마켓에서 프랑스 음악을 틀면 프랑스 와인의 판매가 증가하고, 독일 음악을 틀면 독일 와인의 판매가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를 안전문화에 적용하면, 작업장에서 안전 관련 메시지(포스터, 방송, 색상, 구호 등)가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근로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안전 행동을 실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단순히 ‘안전제일’이라는 구호를 붙여놓는 것을 넘어서, 시각·청각적으로 체계화된 안전 자극 시스템이 필요하다. 환경 자체가 안전을 유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을 들 수 있다. 2011년부터 진행된 특허 소송은 삼성에게 단순한 법적 분쟁이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애플과 대등한 경쟁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프라이밍 효과 관점에서 보면, 삼성은 애플과의 법적 공방을 통해 혁신 기업으로 자리 잡는 효과를 얻었으며, 소비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삼성을 애플과 같은 수준의 브랜드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처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노출은 특정 행동과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산업 현장에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안전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제공되고, 안전 행동이 조직의 일상적인 일부로 자리 잡으면, 근로자들은 자연스럽게 이를 실천하게 된다.
항공업계의 내재화 전략: CRM 사례에서 배우다
항공산업은 이미 심리학적 접근을 활용한 안전문화 내재화 전략을 실천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대한항공을 비롯한 여러 항공사의 승무원 자원관리(CRM, Crew Resource Management) 프로그램이다.
CRM은 단순히 규정 준수를 강조하는 교육이 아니라, 조종사와 부조종사, 승무원이 직급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사소통하고, 위험을 공유하도록 훈련하는 문화 설계다.
표준화된 의사소통, 역할 분담, 상황 인식 훈련 등을 통해 협업 능력과 위기 대응력을 끌어올렸고, 그 결과 항공 안전 수준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이전에는 조종실 내 권위주의 문화 때문에 부기장이나 승무원이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도 조종사에게 이를 쉽게 지적하지 못해 사고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된 CRM은 심리적 안전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 문화 변화를 이끌어낸 대표적 사례다.
또한, 대한항공의 승무원들은 매 비행 전 반복적인 안전 브리핑을 수행하며, 이를 통해 안전 절차를 무의식에 각인시키는 루틴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단순한 반복이나 강제만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무비판적인 복종을 유도하는 방식은 '보여주기식 안전'에 머무를 수 있고, 진짜 변화는 개인이 스스로 동기화되고, 안전을 당연하게 느끼는 환경에서 발생한다.
한국 산업현장에 맞는 실행 전략
한국의 산업현장에서 안전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효과적일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더십의 솔선수범이다. 경영진과 관리자들이 먼저 안전 수칙을 지키고,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여야 조직 전체가 따라갈 수 있다. 또한, 시각적·청각적 프라이밍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구호, 색상, 사내방송 등 반복적인 안전 자극을 환경 전반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
동료 집단 행동을 유도하는 구조도 필요하다. 다수가 안전행동을 실천할 때 개인이 자연스럽게 동참하도록, 또래 간 동조 심리를 활용한 문화 설계가 중요하다. 여기에 더해, 근로자가 위험요소를 신고하거나 개선 제안을 했을 때 즉각적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추면, 자발적인 참여가 활성화된다.
마지막으로, 안전체험과 제안제도를 실질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근로자가 직접 안전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그 내용이 실제 개선으로 이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 안전은 더 이상 강요가 아닌 현장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단순한 규정이 아니라 근로자들의 행동 변화로 작동하는 것이 '안전문화' 다. 안전은 '환경이 만든 습관'이다. 인간의 행동은 조직의 분위기와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습관은 조직의 분위기, 반복되는 자극, 리더의 태도 속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심리학적 전략을 적극 활용한 내재화 시도는 단순 규정보다 훨씬 강력한 변화의 촉진제가 될 수 있다. 안전은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내면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을 때 비로서 '문화'가 된다.
※ 본 기사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2023 안전제안에 관한 지침」,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안전문화 길라잡이, Collin Testing and Psychological Services, Solomon Asch's Study on Conformity Explained, Youtube, 삼성-애플 특허 소송, 권보헌, 최진국, 장정순 「Medical CRM 도입 필요성과 방안에 관한 고찰」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