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고대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인류가 운명 앞에서 품어온 질문을 압축한다. 테바이의 왕자 오이디푸스는 태어날 때부터 비극적 신탁을 짊어졌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 그는 그 운명을 피하려 고향을 등졌지만, 그가 택한 모든 길은 예언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오히려 운명을 피하려는 그의 자유가 운명의 도구로 작동했다.
이 비극은 단순히 ‘운명은 피할 수 없다’는 교훈을 넘어선다. 오이디푸스는 누구보다도 주체적으로 선택하며 살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치열한 선택이 오히려 파국을 불러왔을 때,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자유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운명이란 결국 우리의 자유마저 흡수하는 힘이 아닌가?
까뮈는 이를 ‘부조리’라 불렀다. 인간은 의미를 갈망하지만, 세계는 끝내 침묵한다. 오이디푸스가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예언은 실현되었고, 그의 눈물 어린 항거조차 신의 장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스스로 눈을 찌르며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부조리 앞에서 끝내 눈을 감지 않겠다는, 어떤 반항의 몸짓이었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다.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모두 그의 선택이었다. 예언이 결과적으로 실현되었다고 해서 그 선택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책임을 지고, 그 대가로 추방을 받아들이며, 패배 속에서 주체로 선다. 헤밍웨이의 말대로라면 그는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 인간이었다.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도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닮았다. 구조적 불평등, 불투명한 미래, 끊임없는 경쟁은 마치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온다. 열심히 노력해도 제자리에 머문 듯한 좌절은 자신이 이미 패배자가 아닌가 하는 자기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서사는 다른 길을 제시한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명은 우리에게서 자유를 빼앗지 못한다. 오히려 그 운명을 직시하고, 거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자유다. 오이디푸스가 끝내 부조리를 껴안으며 자기 존재를 증명했듯, 오늘의 청년들도 불확실한 현실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내러티브를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 절망이 아닌 의미 창조, 몰락이 아닌 새로운 시작. 그것이 비극이 남기는 가장 깊은 철학적 교훈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