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미국 EHS 전문가들은 서류상 계획과 실제 대응 사이의 간극을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 작은 허점이 화재, 지진, 대규모 재난 상황에서는 치명적인 공백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대형 건물과 산업시설이 늘어나면서 집단 대피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고령 근로자와 장애인 근로자 비중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모두가 계단을 이용할 수 있다’는 가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안전보건공단 연구원 보고서는 고령 근로자의 사고 특성을 분석하며, 작업 환경/훈련 설계에서 체력 저하와 만성질환을 반영할 것을 권고한다.
계단 이용 가능성에 대한 잘못된 전제
많은 피난 계획은 장애인이나 고령자의 대피 문제를 부차적 문제로만 취급하고 있다. 미국 CDC의 2024년 연구에 따르면, 18세 이상 성인 중 약 18.2%가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걷는데 ‘많이 어렵거나 전혀 불가능하다’고 응답했다.
따라서 계획 수립 시 최대 18.2%의 근로자가 계단 보조를 필요로 한다는 전제를 포함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익명 자기신고 제도의 활성화, △피난 보조 장비의 표준 비치, △전담 보조팀 훈련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도 2021년 초고층 건축물 등 재난관리 업무매뉴얼에는 노약자 및 거동불편자 등을 ‘피난 약자’로 정의하고 이들을 지원할 피난약자 피난유도자 역할을 조직 구성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지침이 명시되어 있다. 또한, 화재의 예방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은 피난유도팀이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 이동이 어려운 피난약자를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키는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소방 인력 의존이라는 위험한 착각
소방관이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는 가정은 지역 재난 상황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로 도로가 차단되거나 소방 인력이 다른 우선 현장에 배치되는 경우, 건물 내부에는 구조대가 즉시 투입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기업의 피난 계획은 외부 구조를 전제로 작성되어 있다. 지난 2024년 아리셀 화재 당시, 대피로 폐쇄 등이 대피 지연의 원인으로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기업 내부에는 △내부 지휘체계, △자체 구조 인력 및 장비, △시간 기반 대피 훈련이 구축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알고 있다'는 잘못된 신뢰
위험 상황에서 사람들은 즉시 행동하기보다 주저하거나 평소 익숙한 출입구로 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연 1회의 형식적인 훈련으로는 실제 대피력을 보장할 수 없다.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예고 없는 훈련, △차단된 통로·정전·엘리베이터 고장 등 현실적 변수 포함, △다양한 언어와 직관적 안내 표지 설치, △신입·외부 방문객 대상 즉시 안내 시스템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도 대형 제조업 사업장을 포함하여 지자체 및 소방당국과 협력하여 합동 대피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훈련은 사업장의 재난 대응 역량을 점검하고 안전보건활동 평가 및 지도 과정에 참고 자료로 활용된다.
법률 준수를 넘어서 운영 준비성으로
법적 규정 준수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EHS 리더들은 “목표는 계획을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지원 없이도 모든 근로자를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사, 시설, 보안, 안전, 현장 관리부서가 함께 상시적으로 대피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또한 근로자 다양성을 고려하는 것은 단순한 안전 문제가 아니라 포용과 권리의 문제이다. 장애인, 고령자, 임산부를 배제하는 피난 계획은 사실상 차별적이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재난 대응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근거 없는 가정에서 비롯된다. 기업과 기관은 피난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켜야 한다. 즉, 반복적 훈련과 장비 확충, 포용적 계획 수립, 그리고 무엇보다 ‘외부 지원 없이도 스스로 모든 근로자를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단순한 법률 준수를 넘어선 진정한 안전 경영이며, 근로자의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