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선빈의 판단
슬기로운 의사생활 신경외과 레지던트 허선빈이 채송화 교수와 마주 앉았다. 환자를 두고 직속상관 당직선생님과 충돌한 사건 때문이다.
사건은 이렇다. 뇌종양수술을 마친 A씨의 담당레지던트 허선빈은, 수시로 중환자실을 드나들며 열과 성을 다해 이상여부를 살폈다. 컴퓨터 수치로만 막연히 환자를 판단하지 않았다. 직접 진찰하고 체크하면서 꼼꼼이 최선을 다했다.
뇌는 수술이 아무리 잘 되었더라도 회복상태를 장담할 수 없고, 수술후유증이나 다른 돌발상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늘 긴장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환자에게 이상한 조짐을 발견하였다. 즉각 당직선생님에게 보고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 버린다.
얼마뒤 상태가 더 심각해지자, 허선빈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다이렉트로 담당교수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빈의 판단이 맞았고 환자는 응급 재수술에 들어가 고비를 넘겼다.
2. 조직사회 애로사항
선빈은 채송화에게 당직상관과 충돌하여 죄송하다고 말하지만, 채송화는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잘못한 것은 맞는데 싸운게 잘못이 아니야. 더 일찍 더 크게 싸웠어야지.
만일 환자분이 잘못되었다면, 전적으로 네 책임이야.
네가 옳다고 생각하면 치열하게 싸워, 그게 의사야."
조직사회속에서 어설픈 권리와 애매한 책임사이에서 고민중인, 수많은 팀원들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내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만에 하나 틀리면 어떡하나,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꼭 책임질 만한 행동을 해야만 하나, 내 말이 맞으면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나, 결과가 좋아도 그 공로는 윗상사가 다 가로챌텐데...
3. 상사와의 논쟁
채송화의 조언은 사실 의료인이라는 특수한 직종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상사와 트러블을 겪든 말든, 의사는 본인 스스로가 이미 자격증을 가진 독립된 자영업자다. 강한 멘탈로 이겨낼 자신만 있다면 웬만한 행동은 다 해볼 수도 있다.
보통의 직장인들에게 상사와의 논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업무적 생명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옳아도 미운털이 박히고, 내가 틀리면 대놓고 미움을 받는다.
바닥에 납작 업드려 꼼짝하지 않은 채, 곰이 죽은 사람인 줄 알고 그냥 지나가기 만을 기다린다. 남들이 그렇게 복지부동하면 답답하다 한심하다 쉽게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치면 목숨걸고 입바른소리 하기는 어렵다.
4. 풍자의 노하우
고대 중국에서는 내 말 한마디에 막연한 정치적 영향력 정도가 아니라, 정말 목숨이 왔다갔다 했다. 왕에게 조언한답시고 "아, 이러시면 안됩니다." 한마디 꺼내는 순간 목이 달아난다.
공자 맹자도 예외가 아니다. 천하에 유명한 그들이라도 처신을 잘하지 않으면 여지없다. 그렇다고 왕이 듣기 좋은 아부만 늘어놓으면 왕도 듣다가 지친다. 구태여 큰 돈주고 개인조언을 들을 이유가 없으면 내쫓아 버린다.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 기꺼이 강의료를 지불하게 만드는 능력이 핵심이다. 우리가 공자왈 맹자왈 문헌들을 열심히 연구할 때, 꼭 기억해야 할 대전제가 바로 이 부분이다. 절묘한 풍자로 목숨도 연명하고 밥줄도 지키는 그 노하우를 캐치해야 한다.
5. 역린
왕을 설득할 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바로 그의 아킬레스건이다. '역린'이라고 부른다. 용의 턱밑에 난 큰 비늘 한쪽을 일컫는 말인데, 실수로 용의 그 비늘을 건드려 아프게 하면 보복을 당해 죽고 만다.
사람도 누구나 그렇게 예민한 부분이 있다. 그 자신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누군가 그 부분을 들추어 아프게 하면, 눈에 핏줄을 세우고 복수를 다짐한다.
그 지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하고 설득해야 한다. 정말 어렵다. 아무나 할 수 있었다면, 공자 맹자같은 전문가들이 필요했을 리가 없다. 당신에게 이런 기술이 없다고 너무 낙담하지 않아도 된다.
6. 우연을 가장하다
다시 허선빈에게 돌아가 보자. 중환자실 환자에게 이상한 증상을 포착했다. 1단계는 내가 발견한 사실이 정말 확실한 지 판단하는 과정이다. 어설프게 그럴지도 모른다며 생각없이 툭 던져보는 무책임한 말 대신, 정말 그 내용이 맞다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 정확히 알고 판단의 근거도 댈 수 있어야 한다.
나의 판단이 맞다는 확신이 들면 이제 2단계다. 결정권을 가진 교수님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중간 당직선생님을 패싱하면 그를 무시하며 역린을 건드리는 셈이고, 일일이 보고해도 그가 건성으로 넘기기만 하면 환자를 살릴 수 없다.
우연을 가장한 접촉이면 어떨까. 다른 업무적 행정적인 건수를 핑계로 교수님과 통화를 하면서 슬쩍 환자정보를 흘린다.
"다음주 학회준비는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참, 그런데요,
제가 아직 수련의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
눈동자 반응은 수술 직후에 몇 mm정도 차이는 괜찮은 것인지요?"
표면상으로는 천진난만한 질문일 뿐이지만, 이후로 교수님이 대화를 리드하고 질문하기 시작하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될 수 있다.
"뇌수술한 환자 자주 볼일이 없어서 그럴텐데, 자주 보면 잘 알게 될거야.
오늘 수술한 A씨 양쪽 눈동자가 좀 달라보이나 보지?"
/"확실하지는 않은데요, 사이즈가 한 3mm 차이가 나고 반응속도도 느려 보여서요."
"뭐야? 당직선생한테는 이야기했고? 아냐, 내가 직접 통화할게."
7. 애정 용기 그리고 차가운 머리
일단 애정이 있어야 한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한 애정, 내가 담당한 환자에 대한 애정, 이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이다. 잘하고 싶고, 일이 잘되면 좋겠고,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 원초적 의지가 있어야 한다. 칭찬받고 출세하고 싶은 인정욕구와는 다르다.
그 애정에 용기가 더해지면, 불의를 바로잡고 싶어진다. 눈앞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꼭 해결하고 싶어 한다. 꼭 나의 이익과 관계가 없더라도 내가 애정하는 부분이니 잘 되게 하고 싶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애정에 용기만 더한 채 물불 안가리고 사방팔방 부딪히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잠시 뜨거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차가운 머리를 작동시킨다.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알리고 설득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이 과정까지 훌륭하게 잘 통과할 수 있다면, 이제 하산이다. 스승님도 더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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