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타인의 위험엔 관심두지 않는 사회
15층 계단을 열심히 올라가던 날은 2016년 5월 어느날 이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바라본 창 밖의 풍경은 처음에 청량한 느낌이었고, 한계단 오를수록 가빠지는 호흡과 함께 여름의 절정을 맛보는 듯 했다.
그날은 오후 반차를 썼던 날이었고, APT 안내방송에는 '현재 승강기 점검중이며, 조속히 조치를 취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멘트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다.
‘아... 그랬구나! 하필이면 이런날 반차를 내서...’
문득 그때 현관입구에서 보호복을 반쯤 벗고서는 담배를 피우며,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던 작업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15층 정도는 언제라도 걸을 수 있다고 평소 생각했는데, 막상 올라가려니 생각보다 많이 힘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날에도 나는 여전히 아파트 계단을 걸어서 내려와야 했고, 저녁에는 집에 갈 수가 없었고, 얼마후에는 그 아파트를 떠나야만 했다.
아니 떠나고 싶었다.
왜 이후로도 아파트 계단을 계속 걸어서 오르내려야 했을까? 그 이유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짐작하고 있는 바가 맞을 것이다.
지속적인 민원과 빠른 교체를 위해 애쓰던 안내방송에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지만, 이미 모두들 알고 있는 안따까운 일이 발생하였다.
내가 그 아파트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생각했던 어떤 생각이 나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담배 피울 시간이 있으면 빨리 좀 고치지...’
‘이기적이게도 다른 사람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이야...’
난 아직도 여전히 무지하고 무식한 것은 아닌가,,, 그날처럼 말이다.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조금만 세심히 보았다면 알 수 있었던,
안타까운 사고들
2014.10월에 경기도에서 판교테크노밸리축제가 열렸다. 당시 현장에는 유명가수들이 축하 공연이 펼쳐졌었고, 이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과 퇴근 인파가 겹치면서 축제를 좀더 잘 보려는 사람들이 주차장과 연결된 환풍기 위에서 모여 있었다. 그러다가 환풍구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지하로 추락하여 16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축제를 기획하고 관리하던 선임 행정원은 비난의 무게감에 스스로의 삶을 저버렸다.
당시 뉴스에서는 환풍구가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추락하기 직전의 휘어진 영상이 빠르게 돌았고, ‘아이돌’이라고 불리는 유명가수의 공연을 보겠다고 올라간 ‘성인’들의 몰지각한 행동을 성토하는 글들이 역시나 빠르게 퍼졌다. 나 역시도 그랬다.
‘뭐한다고 거기 올라가서, 빨리 집에나 가서 쉴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공공디자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늘상 환풍구와 함께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많은 지하철과 함께 그들이 지나는 거리에 담배공초를 버리고, 휴지를 버리고, 때로는 마르린먼로의 치마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올라오던 그 환풍구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다.
무지하다고 지적수준을 의심해야 한다는 비난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산업보건을 전공하고 석,박사를 공부한다는 사람이 그렇게도 무지했던 것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여전히 가려진 위험속에서
자신의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간다
2019년도 사망자는 855명으로 매일 2.3명의 근로자가 우리를 떠나고 있다. 이중 50%인 428명은 건설현장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중 62%인 265명은 추락으로 사망하고 있다. 또한 제조업에서는 206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중 66명인 32%가 끼임사고로 사망하고 있다.
정부의 추락 및 끼임사고 예방의 집중은 언뜻 보면 사망사고를 감축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고를 지도 점검으로 해결 할 수도, 다차원으로 변하는 세상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다.
OECD국가의 평균 사망률의 두배가 넘는 산업재해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눈부신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희생’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러다가 발생한 산업재해는 개인의 부주의이며,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며, 무지한 일이었으며, 누군가의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개인적인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발의와 사회적 합의가 조성될수 있었던 분위기는 아무래도 구의역의 사고와 김용균씨의 죽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먹는 것과 함께 비유해서 표현하는 경우들이 많다.
‘사는게 뭐 있어 먹는게 남는거야’,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더라’.
화성연쇄살인을 모태로 한 영화에서도 진범이라고 확신했으나 증거가 불충분했기때문에 용의자를 놓아줄수 밖에 없었던 형사가 눈에서 눈물과 빗물이 흐르며 내뱉은 말도 ‘밥은 먹고 다니냐’ 라는 애증의 말이었다.
그렇게 많은 영혼들이 우리 곁을 떠났는데 우리의 살림은, 우리의 청춘들은 과연 얼마나 나아졌을까? 힘든 일들은 여전히 비정규직, 일용직의 자리이며 이마저도 낮은 저임금이다. 그리고 여전히 힘든 그들은 죽고, 배고프고, 가방에선 컵라면 한 개뿐이다.
2018년도 자료에 따르면 조선업에서 사고로 숨진 324명의 80%가 하청업체 소속이었다.
기업의 이익창출 ▶ 생산원가 감소 ▶ 임금부담 ▶ 협력업체 ▶ 하청 ▶ 일용직
원청에서는 그들이 안전하게 일 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 그리고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다.
다큐프로그램에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보호구도 없이 정화조에 전신을 잠수하여 청소를 하는 사람들, 안전줄 하나 없이 고대유적지의 잡초를 제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터진 피부와 갈라진 발바닥을 보면서 ‘어떻게, 대단하다, 불쌍하다’ 라고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사회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988년 9월 눈부시게도 푸르렀던 서울에서는 제24회 올림픽 열렸다. 당시 대한민국은 12개의 금메달로 종합순위 4위로 역대 최고의 기록을 세우며 세계 앞에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올렸다.
같은해 7월 2일에는 가난한 형편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돈 많이 벌어서 효도하겠다던 굳건한 마음을 먹고 서울로 상경한 15살 문송면군이 상경한지 두달만에
2평도 되지 않던 작업공간에서 시린 손을 부여잡으며 수은을 투입하다 우리 곁을 떠났다.
2016년 구의역 사고 사망자 김모군 19살
2018년 사망한 김용균 군 당시 나이 24세
그리고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과연 누구를 지키기 위한 법인가
2021년 1월 8일 국회에서는 본회의를 열고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약칭: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재정안을 의결함으로서, 2022년 1월 27일부터는 중대재해로 인한 사고가 발생시 엄중한 처벌을 시행 하도록 하였다.
부칙까지 포함하여 18조의 ‘처벌법’은 아직 시행령과 시행규칙 등 하위규정에 대한 제정을 남겨두고 있지만, 법과 고시를 합쳐 2,000개도 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담아야 할 산업안전보건법을 전면개정하고 난 후의 일이었다.
법이 통과되던 날, 국회 앞에서는 극한의 한파에도 불구하고 ‘누더기법’이라는 오명을 받고 있던 처벌법을 조금이라도 온전하게 재정하기 위한 반대 시위가 열렸고, 지방의 한 폐기물 업체에서는 또 한명의 우리 이웃이 한파보다 더욱 차가운 시신이 되어 우리의 곁을 떠났다.
문송면 군이 우리 곁을 떠난지 33년의 시간이 지났다.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사업주는 힘들다고 하고, 노동자는 유명무실한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취약계층, 소외계층 근로자들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외람되는 말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부 사업주도 노조도 단언컨대, 힘든 일을 대신하고 있는 하청업체 근로자에게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자신이 했던, 누군가가 행하는 위험과 힘듦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하지 않는 일, 나만 아니면 되는 일들로 여기며 무신경하게 있지 않는지 돌아봐야 한다.
일부 로펌은 빠르게 중대재해처벌법을 피하기 위한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법의 취지는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그것은 만인 앞에 평등한 것,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법의 정신이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부의 많고 적음의 가치가 아닌, 인간 자체의 행위와 그것의 결과에 따른 처벌이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기본적으로 규제법으로 처벌의 방점을 갖고 있는 강제법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에 대한 원래의 목적은 상실한 채, 단지 처벌을 받지 않기 위한 법리의 다툼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들은 근로자의 생명을 지키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혹은 그들의 죽지 않을 권리를 지켜주려는 의지를 가지고는 있을까?
근로자들이 보호 받을 수 있는 마땅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사과 한개나 컵라면이 아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마땅히 쉬어야 할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의 가족에게 다시 환환 미소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가, 혹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의 친구가 죽었다.
이제 그들이 우리의 곁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더 늦기 전에 모든 사람이 함께 고민해야 한다.
갑을산업보건센터 링크 http://www.knsdoit.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