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stress)라는 용어는 원래 공학용어로 외부에서 어떠한 물체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힘에 대하여, 내부에서 대응하는 힘이라는 뜻의 응력(應力)에서 출발했다.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의학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스트레스이다. 사실 외부에서 우리의 몸에 심한 압박이 가해질지라도 그 힘에 대응하여 버틸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스트레스라기본다는 나를 성장시킬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캐나다의 의사였던 한스 셀리에(Hans Selye)는 스트레스를 정신적, 육체적 균형과 안정을 깨뜨리려고 하는 변화에 저항하는 반응으로 정의하며 3단계로 구분하였다. 그 단계는 경보단계(alarm), 저항단계(resistance), 탈진단계(exhaustion)이다.
경보 단계
처음 경보단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은 이에 반응하여 체온과 혈압은 떨어지고, 심장박동은 빨라지며, 근육들이 수축하는 현상들이 발생한다.
저항 단계
저항단계는 이러한 상태에서 스트레스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면 외부자극에 대한 저항은 증가하지만 실상 점진적으로 신체의 전반적인 저항력은 점점 저하되어 가는 단계이다.
탈진 단계
마지막 탈진단계는 유해한 스트레스가 장기간 계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새로운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의 저항력이 급격히 붕괴되는 단계이다.
인간의 몸은 스트레스가 높아도 문제가 되지만 낮아도 문제가 된다. 가장 좋은 것은 긍정적 스트레스(eustress)가 일정수준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대부분이 스트레스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지만 긍정적 스트레스는 생활에 활력을 주고, 창의력과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고통에 대하여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뿐이다"라고 하였다. 외부의 자극이 stress가 되느냐, eustress가 되느냐는 나 자신의 반응에 달려있다. 즉 긍정적 스트레스와 부정적스트레스에 대한 기준은 없다. 다만 받아드리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대처하느냐, 부정적으로 대처하느냐 의 반응이 다를 뿐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문명의 발전은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하였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수많은 위협과 압력에서 내부 응집력을 이끌어내어 잘 대응한 집단은 계속해서 살아남아 생존과 번영을 이루었지만, 그렇지 못한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사멸해간 사례는 수없이 많다.
토인비는 강연에서 청어의 예화를 자주 들곤했다. 청어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급 어종이다. 하지만 청어가 잡히는 곳은 북해나 베링해협같은 먼 바다였기에 싱싱한 청어를 먹기가 쉽지 않았다. 배에 싣고 오는 동안에 대부분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살아있는 청어가 런던 수산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했다. 그 비결은 청어를 운반해오는 수조에 청어의 천적인 물메기 몇 마리를 함께 넣는 것이었다. 청어는 매우 큰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그 스트레스가 청어를 살렸다. 청어가 물메기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힘껏 도망다니다 보니 그런 긴장이 청어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인더스문명, 이집트문명, 유프라테스 문명, 황하문명을 꼽는다. 하지만 이 지역들은 결코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인더스, 이집트, 유프라테스는 사람이 살기에 너무 덥고, 황하는 매년 범람하고 사람이 살기에 너무 춥다. 차라리 황하강보다는 양자강이 훨씬 사람이 살기좋다. 그런데도 양자강에서 문명이 생성되지 않았다.
문명의 발상지는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가혹한 환경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사회에서 행복지수가 높고 부유한 국가들은 대부분이 사람이 살기 어려운 북유럽에 몰려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삶이 가혹해야 인간은 분발을 한다. 지금 전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미국을 움직이는 힘은 월스트리트에서 나오는데 유대인들이 이 월스트리트를 장악하고 있다. 2차대전 당시 나찌를 피해 미국으로 몰려든 유대인들은 미국정부로부터 상습 범람지역인 허드슨 강 유역을 거주지로 배정받았다. 그들은 강물을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옹벽을 쌓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금융업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월스트리트가 되었다.
외부에서 우리에게 가해지는 압력들은 결코 우리의 적이 아니다. 같은 스트레스 요인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긍정적 스트레스나 부정적 스트레스로 달라진다. 즉 같은 상황이라도 이를 해석하는 결과에 따라서 질병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처칠은 낙관주의자는 극심한 불운속에서도 기회를 보고, 비관주의자는 엄청난 기회속에서도 불운을 보다고 하였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스트레스는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트레스는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외적요인으로는 물리적 환경, 사회적 환경, 개인적 사건의 변화에서 기인하고 , 내적요인으로는 생활의 습관, 왜곡된 인지 등이다. 그것이 내부적인 것이든 외부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환경의 변화가 없는 세상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 발생하면 그것이 고통이든 쾌락이든 간에 우리의 신체가 반응하는 것은 비특이적인 것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자체가 질병이 아니다. 신체와 정신이 위협받는 상태에 우리는 재적응해야 한다. 이러한 재적응에 성공한다면 스트레스는 오히려 약이 된다.
우리는 외부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대비하여 내부에서 대응할수 있는 응력(stress)을 키워야 한다.
리스크랩연구소 홈페이지링크:
http://www.risklab.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