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건설안전전문가의 시선] 발주자 안전책임, 해외는 ‘의무’… 한국은 왜 제도화 못했나

- 울산화력발전소 붕괴 사고가 던진 질문들.. - 발주자 책임! 선진국은 강화, 한국은 여전히 공허한 구호 - 공사기간의 족쇄, 사고는 반복된다.

2025-11-16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편집국
ⓒ이미지-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생성 책임자: 김희경), Gammas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울산화력발전소 붕괴사고 이후 고용노동부 장관은 발주자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우리나라 건설산업의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건설공사에서 발주자는 최상위 ‘갑’의 위치에 있으며 공사기간·예산·계약조건을 좌우한다. 그러나 근로자의 안전보건 확보라는 핵심적 책무에는 여전히 미흡하다.

 

최근 한 광역지방자치단체 건축안전센터 팀장은 “건설안전특별법이 시행되면 직원들이 사직할 것”이라는 우려를 토로했다. 적정 공사기간을 산정할 역량이 부족한데 그 책임을 떠안게 되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발주자 책임 강화가 제도적으로 도입되더라도 현장에서 대응할 수 있는 역량과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다.

 

 

해외 선진국은 발주자를 ‘안전의 주체’로 규정

영국, 독일, 미국 등 건설안전 선진국은 발주자를 단순한 계약 체결자가 아닌 안전관리의 실질적 주체로 법적으로 규정한다. 영국의 CDM 제도(Construction Design and Management Regulations)는 1994년 도입 이후 지속적으로 개정되며 발주자의 책임 범위를 확대해왔다. 

 

설계 단계에서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계약자 선정 시 안전역량을 평가 요소로 삼도록 규정한다. 나아가 발주자가 시공사·설계자가 안전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까지 부여했다. 즉, 안전시설 확충 예산이나 충분한 공사기간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발주자에게 직접 책임을 묻고 있다.

 

영국은 CDM 제도를 통해 발주자가 설계 및 시공 단계에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충분한 기간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부여하였다. 만약 발주자가 안전시설 확충을 위한 예산이나 적정한 공사기간을 제공하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직접적으로 묻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는 발주자가 단순한 계약 체결자가 아니라 안전관리의 실질적 주체임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 역시 공사기간 연장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현실을 제도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공공 발주기관은 공사기간이 늘어날 경우 이에 따른 간접비와 추가 비용을 제도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 두었다. 발주기관이 예산 반영 근거를 확보하여 시공사에 비용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며 이를 통해 시공사가 무리한 ‘돌관공사’에 의존하지 않고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미국은 연방도로국(FHWA) 연방법 23CFR635.121(계약기간 결정 및 연장)에 따라 공사기간 산정의 기본원칙을 담은 가이드라인(FHWA Guide for Construction Contract Time Determination Procedures)에서 공사기간 산정과 연장을 제도화하였다. 각 주 교통성이 자체적으로 공사기간 산정 기준을 마련하는 분권형 체계를 운영하며 필요할 경우 합리적으로 공사기간을 연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A+B 입찰방식(Cost-Plus-Time)을 도입하여 공사비와 기간을 함께 고려하도록 함으로써 발주자가 현실적이고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기간을 책정하도록 유도한다.


 
이와 같이 선진국들은 공사기간을 안전 확보의 핵심 요소로 인식하고 발주자가 책임을 지도록 제도화하였다. 이는 한국과 같이 공사기간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시공사가 무리한 작업을 강행하는 구조와는 대조적이다. 결국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발주자가 공사기간을 현실적으로 책정하고 필요할 경우 합리적으로 연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공사기간이라는 족쇄가 사고를 유발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사기간 준수가 지나치게 강조된다. 감사원이나 내부 감사의 우려 때문에 발주자는 계약기간 연장을 꺼리고 시공사는 부족한 기간을 맞추기 위해 ‘돌관공사’에 돌입한다. 이에 따라 야간작업과 과도한 인력 투입은 또 다른 안전사고를 낳고 있다. 사망사고 발생 시 고용노동부가 작업중지 명령을 내려도 발주자는 최초 계약기간 내 완공을 요구하면서 또다시 사고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문제는 이러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발주자에게는 실질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사기간 부족과 무리한 일정이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책임은 대부분 시공사와 현장 근로자에게 전가된다. 발주자는 계약상 ‘갑’의 위치에서 공사비와 기간을 결정하면서도 안전사고에 대한 법적·제도적 책임에서는 비켜나 있는 것이다. 이 불균형한 구조가 결국 사고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토양이 되고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발주자가 공사기간을 비현실적으로 짧게 책정하거나 안전예산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하면 “시공사의 관리 부실”로만 귀결된다. 발주자의 결정이 안전사고의 근본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제도적으로 이를 추궁할 장치가 미비하다. 이는 발주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구조적 면책을 제공하며 결과적으로 안전보다 비용과 일정이 우선되는 문화를 강화시켜 왔다.

 

따라서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서는 발주자·시공사·설계자 모두가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특히 발주자가 공사기간과 예산을 현실적으로 책정하고 시공사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도록 강제하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사고 이후 처벌에만 집중하는 방식으로는 근본적 예방이 불가능하다. 발주자의 책임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규정하지 않는 한 안전사고는 계속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다.

 

 

발주자의 책임을 제도화해야

해외 주요 국가들은 발주자를 건설안전의 실질적 책임자로 규정하고 사전 예방 중심의 안전관리 체계를 정착시켜왔다. 한국 역시 발주자의 책임을 강화하는 법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단순히 법을 제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발주자가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충분한 공사기간과 예산을 제공하고 시공사가 정당하게 이를 요구할 수 있는 문화가 마련되어야 한다.


건설안전은 특정 주체의 책임으로 예방할 수는 없다. 발주자·설계자·시공자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제도적으로 보장할 때 비로소 산업재해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