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전문가되기 80부 - 숲의 빗물, '배수 대상'인가 지켜야 할 '생명 자원'인가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풍경은 삶의 가장 진솔한 스승이 된다. 매일 걷던 산길, 익숙한 숲에 갑작스레 시작된 공사 현장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올해 초, 순환 산책로를 만든다며 싹둑 잘려 나간 나무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쌓여 있는데, 이제는 길을 정비한다며 또 다른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번에는 공사 안내판조차 없다. 산책로 옆에 줄지어 놓인 검은 우수관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산책로가 비에 젖어 질척거리고 웅덩이가 생겨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시민 편의를 위해 우수관을 설치한다는 명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이 편리함이 정말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길인가. 숲에 우수관을 설치해 빗물을 서둘러 빼내는 행위는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눈에 보이는 편리함,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
숲은 단순한 나무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체이자 정교한 수자원 관리 시스템이다. 숲에 내린 빗물은 땅속으로 스며들고, 웅덩이에 고이며, 흙과 식생에 붙잡혀 천천히 흐른다. 계곡물이 마르지 않고 꾸준히 흐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숲은 빗물을 저장하고 그 흐름을 조절하며 강과 하천에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하는 ‘자연의 댐’이다.
그러나 우수관이 설치되면 이 지혜로운 순환은 끊어진다. 빗물이 땅속에 스며들 틈도, 흙과 식생이 붙잡아 둘 겨를도 없이 하수관을 따라 하천으로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 그만큼 지하 침투량은 줄어들고, 숲이 본래 가진 수자원 관리 능력은 약화된다.
빗물이 빠르게 흘러가면 유달 시간이 짧아져 하류의 최고 유량(peak flow)이 커진다. 이는 하류 하수도의 수위를 급격히 높여 홍수 위험을 키운다. 눈앞의 불편을 줄이려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숲이 머금은 물이 주는 가치
우리는 지금 기후변화 시대를 살고 있다. 가뭄, 폭염, 산불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이 재난들은 숲의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숲이 물을 머금고 있어야 가뭄에 대비할 수 있고, 땅속에 저장된 수자원은 지속적인 생명의 원천이 된다.
또한 물을 머금은 숲은 폭염에 강한 도시를 만든다. 나무는 뿌리로 흡수한 물을 잎과 줄기로 증발시키며 주변 열을 흡수한다. 이 증발산 작용은 거대한 자연 에어컨처럼 주변 온도를 낮춘다. 하천이나 저수지 옆이 시원한 이유도 물의 비열과 복사열의 특성 때문이다.
더불어, 물을 머금은 숲은 습도가 높아 산불을 예방하고, 불이 나더라도 확산을 막는 소방수 역할을 한다. 올해 우리가 겪었던 대형 산불을 떠올려 보라. 숲의 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실제로 다른 나라에서는 숲에 인공 웅덩이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고 산불 진압에 활용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거꾸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눈앞의 작은 편리함을 위해 숲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숲의 빗물은 단순히 빨리 흘려보내야 할 ‘배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생명 자원’이기 때문이다.
이종탁의 생각정원: http://blog.naver.com/avt17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