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위험 연구실에도 칼같은 규제, 고위험 연구실은 무방비… 연구현장의 이중 규제

- 실험도 없는 AI연구실에 화공 점검표? 제도개선 시급

2025-05-03     고승훈 산업현장 명예 기자
ⓒ[AI 생성 이미지]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생성 책임자: 김희경), chat-GPT 4o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연구실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는 물 한 방울도 못 마시게 합니다."

 

인공지능 연구를 수행하는 한 기업부설연구소의 연구원 A씨는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뭐가 위험하다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현장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게 된 중심에는 일률적으로 규제를 못박은 ‘연구실 안전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이 있다.

 

 

유해인자 없어도… 취식 금지, 일상점검, 안전교육 의무 부담

해당 법률은 유해·위험인자가 존재하지 않는 '저위험 연구실'조차도 일률적으로 취식 제한, 매주 일상점검, 법정 안전교육 이수를 의무화하고 있다. 물이나 커피를 책상 옆에 두는 것도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셈이다.

 

유사한 법령인 산업안전보건법의 경우 '소프트웨어 개발 및 공급업' 등 일부 업종은 안전교육 면제 대상에 해당하지만, 연구실안전법은 그런 예외 조항조차 없다. 이에 따라 AI·빅데이터·컴퓨터공학 등 비(非)실험 분야 연구자들도 동일한 규제를 받고 있다.

 

또한 일상점검 항목에서도 현실과 괴리가 존재한다. 연구실안전법상 점검일지에는 화학물질, 고압가스, 안전보호구 등 전통적인 실험실 환경에서 필요한 항목들이 포함되며,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해당사항이 없더라도 점검 항목은 제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점검 항목을 누락할 경우 법령 위반으로 간주되어 현장점검 시 행정처분을 받게 된다. 결국 저위험 연구실도 필요 없는 화공안전 점검표를 출력해 형식적으로 비치해야 하는 다소 황당한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독성가스 취급 연구실은 '무방비'

아이러니한 것은 반대로 고위험 연구실에 이루어져야 할 규제는 '공백상태'라는 점이다. 예컨대 독성가스를 취급하는 일부 고위험 연구실은 연구실 외부에 어떤 물질이 사용되는지 표기할 의무조차 없다. 이로 인해 주변 사무실이나 연구실 구성원들이 독성가스 취급 여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합리적 근거' 바탕의 '합리적 규제' 필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저위험 연구실에서조차 취식이 금지된 사유를 문의하자, 관계자는 "해당 기준은 연구실안전심의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이라고만 답변했다.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나 과학적 근거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연구현장에서 "행정편의주의적인 황당 규제"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지금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지적한다. 진짜 위험이 존재하는 고위험군 연구실에는 강화된 안전관리 체계를 도입하고, 저위험 연구실에는 자율권을 부여해 행정 낭비와 현장 반발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연구개발(R&D)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도 연구 환경에 대한 규제의 정합성과 과학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연구기관의 연구실안전환경관리자는 “나조차도 납득이 안되는 법령을 지키라고 안내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라며 고개를 떨궜다.

 

실험도 하지 않는 연구실에서 매주 화공안전 점검표를 붙이고, 책상 위 물병 하나도 숨겨야 하는 지금. 누구를 위한 안전이며, 누구를 위한 규제일까. 진짜 위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규제가 아니라 '현장과 상식'이 중심이 되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