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전문가되기 72부 - 경계에 갇힌 설계, 깊어진 하수관로

- 사업 구역만 따지다 놓친 것들, 하수관로 설계에서 드러난 구조적 문제

2025-04-23     이종탁 자문 위원
ⓒ[AI 생성 이미지]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생성 책임자: 김희경), chat-GPT 4o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대도시 하수관로 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다. 기본 및 실시 설계를 한 번에 할 수 없어 구역을 나누어 발주했다. 시간차를 두고 구역별로 설계가 진행되고 있으며, 각 구역의 설계사는 서로 다르다.

 

구역 분할은 사업 물량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즉, 분할된 구역의 사업 규모가 비슷하도록 경계를 설정했다. 다시 말해, 사업을 분할한 경계가 꼭 그곳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설계자는 이렇게 설정된 경계 영역 안에서만 일하려 한다. 자신의 과업 범위, 즉 경계 영역만 고려하다 보니 불합리한 점이 발생해도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수관로는 자연 유하 흐름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지형이 높은 곳에서 낮은 방향으로 하수관로를 계획해야 한다. 반대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계획하면 매설 심도가 깊어진다. 도심지에서 매설 심도가 깊어지면 굴착을 더 깊게 해야 하고, 이는 공사를 어렵게 하며 작업자의 안전사고 가능성도 높인다. 흙막이 가시설이 필요한 구간은 공사 기간을 연장시켜 주민들의 불편을 가중시킨다.

 

하수관로 설계의 핵심은 지형 여건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방향으로 노선을 계획해 매설 심도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설계 도서를 살펴보니 하수관로 매설 심도가 매우 깊은 구간이 있었다. 원인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노선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 하나, 사업을 분할한 경계 영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다.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다.

 

하지만 경계 영역을 벗어나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수관로 노선을 높은 곳에서 낮은 방향으로 계획할 수 있으며, 이는 매설 심도를 낮출 뿐만 아니라 사업 지역 전체의 매설 심도를 낮게 조정할 수 있게 한다. 당연히 설계 도서를 수정해야 한다.

 

이런 일은 우리 삶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남이 설정한 경계 영역, 의미 없는 울타리에 갇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할 때가 있다. 아무도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그 속에만 머물고 있을 수 있다. 벗어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경계임에도 불구하고, 넘어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이 만든 울타리를 벗어나도 된다. 넘어도 된다. 벗어나 보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더 많은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다른 사람의 울타리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이종탁의 생각정원: http://blog.naver.com/avt17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