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뒤흔든 대형재난사고 13부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2)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한국에 레이온 제조 설비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64년이다. 화신그룹의 창업자 박흥식은 일본의 섬유 기업 도레이사의 전신인 동양레이온으로부터 6년간 24시간 풀가동하여 이미 감가상각이 끝난 레이온 기계를 36억 엔을 주고 인수했다. 일본에서는 1916년부터 인견사 제조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동양레이온은 이 설비가 심각한 이황화탄소 중독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박흥식 사장은 경기도 미금시 도농동 16만 평 부지에 인조 견사를 만드는 흥한화섬(주)을 설립했다. 하지만 공장 가동 1년만에 경영 악화로 산업은행에 매각되었다가, 1972년에 동선화학에 인수되어 세진레이온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다시 1976년에는 원진산업이 인수하여 원진레이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사업 악화로 1979년에 산업은행이 법정관리를 맡게 되었다. 1982년부터 군 장성들과 산업은행 간부들이 번갈아 가며 경영을 맡아 왔다.
적자 기업이라 설비 투자가 미흡했던 것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근로자의 목숨이 걸린 이황화탄소 중독 문제를 방치했다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할 행위였다. 사측은 이황화탄소의 유해성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어 환기 설비를 설치하긴 했지만, 설치 상태도 엉망이었고, 직원들은 직접적으로 이황화탄소에 노출되었으며, 맹독성 가스를 중화시키지도 않고 외부로 직접 배출해왔다. 이로 인해 원진레이온 공장 인근에 설치된 각종 시설물과 중앙선 전철 등의 설비가 심하게 부식되었고, 인근 지역을 달리던 차량들은 이 곳을 지날 때 창문을 꼭 닫아두어야 했다.
《한겨레》 신문에 원진레이온 사건이 보도되자 원진레이온을 다녔던 사람 중에서 비슷한 증상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원가협(원진레이온 피해 노동자 및 가족협의회)이 만들어졌고, 시민단체가 모여 대책위(원진레이온 직업병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정부와 회사를 상대로 직업병 보상을 위한 싸움에 들어갔다. 원가협과 대책위는 노동부와 국회를 왕복하며 항의 집회와 진정을 거듭했고, 평민당 박영숙 의원의 중재로 회사 측과 합의가 이루어졌다. 한편, 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이황화탄소 작업 환경 중 노출 기준을 기존 20ppm에서 10ppm으로 낮추었다.
결국 원진레이온은 1993년 7월 10일, 회사 설립 후 31년만에 폐업하였고, 공장 부지는 아파트 부지로 3,670억 원에 매각되었다. 산업은행은 직업병 환자 보상을 위해 원진관리재단을 설립했고, 기금을 조성해 원진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원진복지관 등의 직업병 예방과 치료 전문 기관을 설립하였다. 원진레이온 설비는 폐업 후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의 국영 화학섬유총공사에 매각되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이처럼 환경 오염과 치명적인 산업재해를 유발하는 산업이 제3세계로 이전되면서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한국과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이것이 걱정된 일부 양심 세력은 중국 공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입장을 중국 정부에 전달했지만 거부당했다.
한국의 재해율
통계만으로 보면 한국은 산업재해에 있어 선진국이다. 근로자 수 100명당 발생하는 재해자 수를 뜻하는 재해율은 독일이 2.65%인 반면, 한국은 0.5%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로자 수 만 명당 발생하는 사망자 비율인 사망만인율을 비교해 보면, 독일이 0.15인에 비해 한국은 0.53으로 3.5배가 더 높다. 이러한 이상한 통계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아직 보건 분야의 후진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매년 25만 명의 암 환자가 발생한다. 이중 직업성 암 환자는 유럽의 경우 보통 전체 암 환자의 4%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의 직업성 암 승인율은 0.06%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3년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2,016명이었다. 이 중 70%에 해당하는 1,418명이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였다. 2023년 이전에는 직업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체 사망자의 60% 수준이었으나, 이 수치가 계속하여 높아지고 있다. 선진국의 사례를 볼 때 우리나라에서 산재로 인정되지 않은 직업성 질병 사망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선진국은 산업재해의 문제를 안전에서 보건으로 넘어갔지만, 우리는 안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보건 문제는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에서는 직업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산재 인정을 받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2007년 3월 6일 급성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 씨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으며, 과학고등학교에서 6년 동안 3D 프린터를 활용해 수업했던 서울 씨가 2020년 7월 7일 육종암으로 사망했지만 직업 관련성이 낮다는 이유로 산재 인정을 받지 못했다.
노동부는 2023년 5월 22일 산업장 위험성 평가에 관한 지침을 전면 개정하여 사업주와 근로자가 함께 참여하는 자기규율 예방체계를 구축하도록 했다. 위험성 평가는 2013년에 법제화되어 2014년에 시행되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 향후 근로감독관은 산안법 위반 등에 관련한 사업장 감독보다는 사업장이 위험성 평가를 제대로 실시하고 있는지 여부를 집중적으로 감독하게 된다. 그리고 남는 인력을 보건 관리 감독에 투입할 계획이다.
현재 국내에 산업안전보건 근로감독관은 약 800명 수준인데, 이 중 산재 담당 근로감독관은 50%도 채 되지 않으며, 그중 50%가 3년 미만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근로감독관이 산업재해를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최소 10년 정도의 경력이 필요한데, 정부의 행정력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정부에만 맡겨 놓아서는 안 된다. 산업재해 문제는 1차적으로 사업주와 근로자의 무관심으로 인해 발생하고, 2차적으로 안전에 대한 사회적 풍토와 문화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 정부는 그 다음이다.
한국은 2021년 UN 회원국의 만장일치 가결로 선진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선진국이란 경제력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야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선진국의 문화는 일에 대한 의식의 변화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일에서 행복을 느끼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기에 일이란 국제노동기구(ILO)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품위 있는 노동(decent work)이 되어야 한다. 이제 그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은 우리 국민 전체의 몫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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