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뒤흔든 대형재난사고 13부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1)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 원진레이온 사건은 서울올림픽을 한창 준비 중이던 1988년 7월에 발생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였다. 원진레이온 공장이 가동되는 기간동안, 거의 2만 명에 달하는 근로자가 거쳐갔고, 1,000명이 넘는 직업병 환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졌다.
레이온은 비스코스 레이온(Viscose Rayon)의 준말로 인조 비단을 뜻한다. 비단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던 섬유로, 누에고치에서 뽑은 실로 만든다. 중국의 비단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구로 전파된 후, 유럽 곳곳에서 누에를 직접 키워 비단을 만들었는데, 19세기 말 누에 전염병인 페브린병이 돌아 누에가 모두 죽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 영국의 화학자 찰스 프레드릭 크로스는 에드워드 존 베번, 클레이튼 비들과 함께 누에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비단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것이 면 조각이나 나무 및 종이 조각을 화학 약품으로 녹여 뽑아내는 인조 비단인 비스코스 레이온(Viscose Rayon)이다.
레이온은 목재 펄프를 알칼리 셀룰로오스와 이황화탄소의 화학적 반응을 통해 걸쭉한 방사액으로 변형시키고, 이를 실의 형태로 굳혀서 만든다. 당시 원진레이온에는 목탄과 유황을 사용해 이황화탄소를 제조하는 이탄 공정과 셀룰로오즈와 이황화탄소를 사용해 인견사를 생산하는 방사 공정 등이 있었다. 문제는 이들 부서에서 사용하는 화학 약품이 이황화탄소였다. 이황화탄소는 유황과 탄소가 화합하여 생기는 무색 액체로, 지방·고무·수지의 용제 및 살충제로 쓰이며, 만성 중독될 경우 만성 뇌막 부종, 생식 기능 장애, 말초 신경 장애, 내분비 기능 파괴 등 거의 온몸의 기능을 파괴하는 무서운 물질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대인을 죽이던 독가스의 원료로 사용될 만큼 맹독성을 가진 기체였다. 하지만 회사는 이러한 위험성을 직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실을 만드는 공정에서 이황화탄소 가스가 뿌옇게 올라와 실내가 안개가 낀 것처럼 자욱했지만, 직원들은 너무 더워 마스크를 쓸 생각도 못했고, 그 뿌옇고 달콤한 냄새가 나는 가스가 치명적인 독성가스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 중 체격이 건강한 직원도 1년도 지나지 않아 체중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고, 일을 끝내고 나오면 눈이 따끔거렸으며, 더러 소변에서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이황화탄소가 어찌나 독했던지, 아침에 작업복에 넣어간 동전은 집으로 돌아올 때 새카맣게 부식돼 있곤 했다. 당시 원진레이온에는 1,500명이나 되는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이황화탄소
이황화탄소는 1796년 독일의 화학자 람패디우스(Lampadius)가 황철광과 숯을 혼합해 만든 물질로, 고무, 셀로판, 인견 등의 섬유 합성에 사용한다. 레이온 공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고무 공장에서도 많이 사용하며, 셀로판 공장이나 농약 공장에서도 많이 사용한다. 이황화탄소는 기름을 녹이는 성질이 있어 유기용제의 하나로 사용되고, 휘발성이 강해 호흡기를 통해 쉽게 신체로 유입된다. 강한 신경 독가스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용으로 사용됐다.
이황화탄소의 독성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고농도에서는 의식을 잃고 생명을 잃으며, 1,000ppm 정도에 노출되면 극심한 분노와 환상 등의 정신 이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급성 중독이 아니라 만성 중독이다. 이황화탄소로 인해 만성적으로 발생하는 건강 장애를 나열해보면, 신경계통에서는 뇌가 위축되거나 뇌혈관이 막혀 생기는 뇌경색증과 팔다리가 무겁고 아프고 저리며, 심해지면 마비가 되는 다발성 신경염이 있다. 혈액 순환과 관련해서는 심장에 피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생기는 협심증과 관상동맥질환이 생기고, 눈 속의 작은 혈관이 부풀어오르거나 망막에 변성이 오기도 한다. 또한, 콩팥이 망가져 신부전증이 오고 간 기능의 장애가 생기며, 성 기능 장애와 무정자증이나 기형 정자가 생기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이황화탄소의 유해성이 보고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였다. 1900년대 초부터 1930년까지 레이온 공장에서 근무하던 근로자들에게서 신경 증상과 정신병적 장애가 심각하게 보고되었다. 이 일로 인해 레이온 산업은 미국에서 일본으로 이전됐다. 1927년부터 일본에서 이황화탄소 중독 사례가 보고된 이래 1964년까지 이황화탄소로 인한 뇌혈관 장애, 정신 이상, 사지 마비 환자가 속출했다. 이 문제가 된 기계가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원진레이온 사건으로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황화탄소로 인한 직업병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1981년부터였다.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인해 직업병 환자가 나오기 시작했는데도, 노동부는 1986년에 25,000시간 무재해 달성으로 원진레이온을 표창했다. 산업재해에서 눈에 보이는 안전만 중시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보건을 등한시한 결과였다. 방사과에서 일하던 서용선 씨는 온몸의 힘이 빠지며 자주 쓰러지는 증세가 발생해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로 우측 다리의 무력증과 반신이 저리는 등 중풍과 비슷한 증세가 발생했다. 퇴사 2년이 지난 1986년 8월에는 오른쪽 신경과 얼굴 근육이 완전히 마비될 정도로 악화되었다. 1985년 1월에는 김용윤 씨, 1986년 10월에는 정근복 씨, 1987년 2월에는 강희수 씨 등이 서용선 씨와 비슷한 증세로 인해 회사를 그만두거나 휴직계를 내야 했다.
회사는 휴직계를 낸 사람들에게 장기 휴직을 하면 퇴직금이 줄어든다고 하며 퇴사를 종용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직업병인 줄 모르고, 중풍인 줄만 알고 병원을 전전하던 중, 주위에 같은 증세로 고생하고 있는 동료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대 환경의학연구소는 1986년에 원진레이온의 근로자를 대상으로 특수 건강진단을 실시하고자 했으나, 회사의 비협조로 실시되지 못했다. 당시 회사는 작업환경 측정 및 건강진단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으며, 측정 기관과 건강진단 기관 대부분이 비협조적이었다. 우리나라는 1983년에 노동부 고시에 의해 작업환경 측정 규정이 시행됨으로써 실질적인 틀을 갖추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장비 및 전문 기술 인력 등이 부족했으며, 사업장의 작업환경 측정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저조하여 실질적인 측정이 활성화되지 못했다.
직업병 피해자들은 1987년 2월 노동부 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에 원인 규명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내었고, 1987년 4월에 고려대 환경의학연구소의 정밀 진단 결과 이황화탄소 중독이었음이 밝혀졌다. 《한겨레》 신문의 안종주 의학 담당 기자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안 기자는 먼저 강희수 씨를 찾아가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안전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아뇨.”
“이황화탄소가 어떤 물질인지 아십니까? 그 물질에 대해 위험 교육을 받은 적이 있나요?”
“입사 20년 동안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떤 교육을 받았나요?”
“일 년에 한 번 불조심 교육을 받았습니다.”
안 기자는 강희수 씨와 함께 정근복 씨를 만나러 갔지만, 정근복 씨는 자신의 병과 관련해 민형사상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써주고, 회사로부터 600만 원을 받기로 했다며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서용선 씨를 찾아갔다. 서용선 씨는 두 다리와 한쪽 팔을 전혀 쓰지 못했고, 말도 못했으며, 혼자 힘으로 앉지도 못했다. 파출부 일을 나간 엄마를 대신해 초등학생인 아들이 아버지의 입에 라면을 넣어줬지만, 그조차 삼키지 못하고 계속 바닥에 흘렸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을 취재할 수 없었기에, 안 기자는 사진만 찍고 돌아와야 했다.
이후 며칠간의 취재 끝에, 원진레이온에서 비슷한 증상을 앓다가 퇴직한 사람이 12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취재한 내용을 1988년 7월 22일자 사회면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인견사를 생산하는 원진레이온 공장에서 신경 독성 물질인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가 잇따라 발생, 말과 몸 움직임이 부자유스러운 중증 마비 상태에 이르러 회사로부터 강제 퇴직당한 사람이 1986년 이래 12명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독은 주로 이황화탄소 용액으로 녹인 펄프에서 인조 견사를 뽑아내는 방사과에서 발생했는데, 퇴직자 중 서용선(46), 한병화(52) 씨 등은 팔다리가 완전히 마비되고 말을 못하며, 대소변도 못 가리는 심한 장애에 빠져 있으며, 정근복(49), 정명섭(46) 씨 등도 정상적인 사회 활동이 어려운 상태다.”
처음에는 12명인 줄 알았던 피해자는 보도가 나가자 수백 명으로 늘어났고, 다시 1,000명으로 증가했다.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1991년 김봉환 씨는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망했고, 같은 해 권경용 씨는 방에 연탄불을 피워 놓은 채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 1992년 고정자 씨는 정밀 검진을 받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권경룡 씨는 정신 장애와 통증으로 신병을 비관해 자살했다. 이는 모두 이황화탄소의 독성 특성 중 극도의 불안과 분노, 자살 경향, 정신병, 악몽 등의 장애 원인 때문이었다.
※ 이후의 이야기는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사건(2)에서 이어집니다. 원진레이온 사건이 남긴 교훈과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는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리스크랩연구소 : http://www.risklab.co.kr